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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내게 묻는다. 당신의 상상력은 어디서 나오는가? 당신의 연출가적 리듬과 이미지는 어떻게 형성되는가? 그러면 나는 일단 ‘시적(詩的)’이라고 대답한다. 그렇다면, 시를 쓰지 못하면 연극을 할 수 없는가? 그렇지 않다. 내가 말하는 시적이란 의미는 시를 짓기 이전의 정서적 상태를 말한다. 일상의 공간과 다른 시적 공간은 현실 저 너머의 세계이거나 인간의 내면에 자리 잡는 심연(深淵)-의식의 깊은 연못 같은 것이다. 현실은 항상 우리에게 결핍과 불안감을 자극한다. 그러면서도 매일 단순 반복되는 지루한 타임 테이블이다.
이 삶의 지루한 단순 반복을 거부하는 힘은 어디서 분출되는 것인가? 1970년대의 젊은 비평가 김현은 상상력이라고 말했다. 그렇다. 상상력이다. 나는 김현의 첫 평론집 <상상력과 인간>을 밑줄 그어가며 읽으면서 인간의 결핍을 채우는 영약이 상상력이란 믿음을 갖게 됐다. 저 혼자만의 사색과 상상이 유일한 노동이었던 20대 청년 백수에게 살아야 할 이유를 제공해준 책이다.
김현의 두둑한 에세이 ‘광태연구’는 가난하고 누추한 삶에 저항했던 위대한 천재들의 광기를 기록하고 있다. 김현은 여기서 굶어 죽은 고려시대의 시인 임춘의 시와 삶을 조명한다. 그리고 이 고려조의 시인과 프랑스의 미조네이즘(새것 기피)을 비교, 분석한다. 가난과 하찮음에 대한 임춘의 탄식은 보들레르식의 표현을 빌리면, ‘저주받은 시인’의 실존적 모습이다.
또 19세기 프랑스 시인 라마르틴과 뮈세의 실연, 보들레르의 술과 아편과 창녀, 알프레드 드 비니의 로맨티시즘, 말라르메의 황혼에 대한 경배, 마침내는 네르발의 광태를 읽어내면서 현실에 뿌리박지 못한 불우한 예술인들의 존재를 드러낸다. 나는 이 ‘저주받은 시인’의 광기를 현실에 맞서는 저항의 에너지로 수혈받은 것이다.
한국 문학에서 그의 가장 큰 공로는 우리 문학을 그만큼 읽은 사람이 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분량의 꼼꼼한 책읽기에서 비롯된다. 그는 언제 읽었는지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소설,시,평론 등을 읽고 중요한 것은 자기 나름대로 정리해서 글을 발표한다. 그가 제일 싫어한 것 가운데 하나가, 자신이 읽지 않고 풍문으로 말하는 것이다. 그는 좋은 신인을 발굴하고 인정하는 작업을 가장 많이 한 비평가일 것이다. 그것은 그의 끝없는 독서와 탁월한 감식안에 의하여 가능하다. 그가 그처럼 열심히 읽은 것은, 4.19로부터 시작된 격동의 역사 속에서 문학인을 무엇을 할 수 있고 문학은 무엇일 수 있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문학 이념을 내세우는 데 있어서 구체적인 작품에 근거하지 않은 이론을 몹시 싫어한다. 그러한 이론은 그 자체로서도 공허할 뿐만 아니라 문학을 문학 아닌 다른 이념에 종속시킴으로써 문학의 힘과 역할을 왜곡,약화시킨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 정신 속에 팽배해 있는 허무주의와 패배주의를 극복하고 우리 사회 속에 숨어 있는 샤머니즘을 타파하는 데서 문학의 역할을 찾고 있다. 시와 소설을 정확하게 읽고 정밀하게 분석하고 전체적인 전망 속에 해석한 그의 평론집들은 바로 그러한 그의 문학관을 뒷받침해준다.
프랑스 문학자로서 그는 해방 후 제 3세대라고 할 수 있지만 첫번째 한글 세대인 그가 남긴 업적은 외국 문학의 연구 수준을 한 단계 올려 놓은 것으로 평가된다. 그는 초현실주의,실존주의,구조주의,후기구조주의 등 20세기의 주요한 문학사상의 흐름을 파악하고 그 진정한 의미를 제시하기 위해 독창적인 비평사를 완성했을 뿐만 아니라, 바슐라르, 공드만, 지라르, 푸코, 그리고 쥬네브학파에 관한 주요한 저술을 남겼다. 그의 연구와 저술은 사계에서 국제적인 수준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는 외국 문학을 학자로서만이 아니라 비평가로서 연구함으로써 그의 저술의 궤적을 추적하는 것이 그의 정신의 풍요로운 성장 과정을 확인하게끔 만든다.
그가 꿈꾸어온 세계는 자유와 평등이 보장되어 있는 억압 없는 사회였지만 그가 살아온 세계는 폭력이 지배하는 야만적인 사회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한번도 긴장된 의식의 줄을 풀지 못하고 고통스런 성찰로 가득한 삶을 살아왔다. 그가 문학을 한 이유는 눈에 보이지 않는 삶과 세계를 보다 잘 볼 수 있다는 데 있다. 그의 글이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은 그의 고통스런 성찰을 통해 우리가 세계와 삶의 모습을 보다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와 마찬가지로 폭력없고 자유로운 사회에 관한 꿈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방법을 모색하게 한다.